YWCA 회원이 만드는

정의, 평화, 생명세상

YWCA 역사와 회원대회

YWCA 태동과 함께한 하령회

1922년 4월 22일 결성된 한국YWCA는 올해로 창립 94주년을 맞았다. YWCA는 창립 직후부터 회원들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전망을 배우는 하령회(夏令會), 전국대회(총회), 회원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열어왔다. 그 출발은 창립 직전인 1922년 4월 4일부터 9일까지 중국 북경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연맹(WSCR) 회의였다. 이때 한국 기독교 여성으로는 최초로 YWCA 창립을 주도한 김활란, 김필례 두 젊은 지도자가 WSCR 회의에 참석했다.

김활란, 김필례는 귀국 뒤 “기독운동의 새로운 비전과 전망을 배웠다”는 소감을 전했고, 그들의 배움이 YWCA에서 개최하는 모든 대회의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초기 YWCA 총회는 1년에 한번 하령회와 함께 열었는데, 연합회가 주관했고 각 지역과 학생대표들의 보고, 토의로 진행했다.

첫 하령회는 1922년 6월 12일부터 22일까지 열린 제3차 여성기독교청년회 3차 발기회와 함께 열었다(하령회 마지막 날인 6월 22일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합회 기성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제1회 총회에서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로 이름을 바꾼다). 하령회 회장은 김활란, 총무는 김필례가 맡았다.

청년들에게 사명감과 책임감을 심어주다

제1회 하령회에는 전국 고등여학교 대표와 각종 여성단체 대표, 일반 사회지도자들을 초청했고, ‘세계 여성들의 책임’이란 주제 강연으로 여성들에게 ‘세계’라는 미래비전을 제시했다. 이때 하령회도 지금처럼 사회이슈를 주제로 삼았는데 공창폐지, 문맹퇴치, 물산장려, 여성지위와 자질향상, 자아의식 개발과 생활개선 등의 내용이었다. 민족정신과 독립사상 고취가 근간을 이루며 참가자들에게 자긍심과 애국심을 갖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1927년부터는 YMCA와 YWCA 합동으로 전국 남녀기독항생 하령회를 열었다. 매년 열리는 남녀기독학생 하령회는 참가자를 제한해야 할 만큼 인기가 높았다. 조만식, 이상재를 비롯한 애국지사, 대학자, 기독교단 지도자들을 강사로 초청했다. 이들은 새로운 사회과학 지식과 애국애족 정신을 전달했으며 청년들에게 사명감과 책임감을 심어주었다. 남녀기독학생 하령회는 1933년 7회로 중단되었다가 1949년 부활한다.

일제 압박으로 1941년 YWCA 활동이 휴회했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신의경, 김성실 중심으로 YWCA를 재건한다. 1947년 8월 12일부터 20일까지 그동안 중단된 전국대회와 하령회를 재개하면서 프로그램 개발과 실천을 위한 실무자 양성, 위원 선출, 회원Y 재건 등 YWCA 조직강화를 시작한다.

YWCA 재건과 전국대회·하령회 부활

초기 전국대회(총회)와 하령회는 한국YWCA연합회 최고 의결기구이자 교육프로그램으로서 여성들의 시대적 안목을 기르고 단체활동 경험과 민주주의적 회의운영 방법 등을 체험하도록 하였다. 1948년 제15회 임시 전국대회에서 매년 열던 전국대회를 2년마다 열기로 헌장을 개정하고, 하령회도 분리한다. 기독학생운동의 특수성을 감안한 것으로 학생Y는 대학생Y와 Y-틴으로 나뉜다. Y-틴은 1954년부터 전국대회가 열릴 때마다 별도로 전국Y-틴 하령회를 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부산 피난에서 서울로 돌아온 연합회는 1954년 제18회 전국대회를 서울YWCA 강당에서 열었다. 12개 지역Y, 대학Y, Y-틴 등 2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이때 여성지위에 관한 연구를 중점사업으로 채택하고, 회원들이 직접 참여하는 운동체로 발전시킬 것을 결의한다. 여성지위 향상을 위한 사업은 계속해서 전국대회 중점운동으로 채택되고, 혼인신고 강조운동과 축첩공무원 추방운동 등을 벌인다. 문맹퇴치를 위한 성인교육, 학생운동, Y회관 마련을 위한 대책 등도 주요하게 논의된다.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거치면서 YWCA도 전환을 맞는다. 그동안 회관중심 활동에서 벗어나 지역을 기반으로 조직활동을 펼치게 된다. 1964년 제22회 대회부터 3년에 한 번씩 전국대회를 열었는데, 2009년 대회까지 45년간 이어졌다. 이후 빠른 시대변화에 따라 2년마다 전국대회를 열자는 결의에 따라 다시 2년 주기의 대회로 전환한다. 이때부터 참가자와 대회 내용에 큰 변화가 온다.

다짐과 화합의 장, 회원대회

2009년 이전까지 전국대회는 중점사업 결의, 헌장 개정, 실행위원·공천위원 선출을 위한 사무회의와 더불어 회원Y간 회원간 유대를 다지며 신앙과 지도력을 높이는 교육, 친교를 통합한 축제의 장이었다. 회원Y 이사, 위원, 실무자, 대학생, Y-틴까지 정식대표·방청대표 1,000명 이상 참여하는 큰 행사인 만큼 1년 전부터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분과마다 실무준비를 하였다. 그 결과 잘 짜인 프로그램과 새로운 비전제시로 참가자들에게 자긍심을 갖게 해주었다.

다시 2년 주기로 바뀌면서 전국대회 개최기간도 줄이고, 사무회의와 선거 등 행정 위주로 진행되면서 정식대표만으로 압축된 대회를 열었다. 이에 따라 전국대회에 빠진 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전국대회와 전국대회 사이에 2년마다 회원대회를 열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2012년 8월 18일 서울 올림픽핸드볼경기장에서 4,500명 규모의 전국회원대회가 열렸다. 전국대회 참가자뿐 아니라 다문화여성, 돌봄, Y-틴, 청년 등 모든 회원들이 모여 정의, 평화, 생명의 가치를 실천하는 YWCA 목적을 확인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자리가 되었다.

첫 회원대회는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1972년 개최한 회원대회였다. 당시 YWCA 미래를 생각하면서 창립 100주년을 맞아 찾을 수 있도록 회원들이 50년간 250,000원을 적립할 것을 결의하기도 했다. 그 뒤 1981년, 1987년, 1992년(창립 70주년 기념), 1999년에 회원대회가 열렸다. 또한 지역별 회원대회라는 이름으로 시대에 따라 중부, 영부, 호남 또는 북부, 동부, 중부, 서부, 경기로 나뉘어 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밖에도 전국 회원들이 한뜻으로 모여 결의를 다지고 실천지침을 채택한 대회로는 1977년 ‘소비자운동은 인권운동이다’는 주제로 ‘한국Y소비자전국대회’를 열어 소비자의식을 높였다. 또한 도덕성 회복으로 바른 삶을 실천하자는 각성운동으로 1990년 ‘바른삶실천대회’를 열었는데, 여기서 ‘아나바다’ 용어가 처음으로 탄생했다. 1994년과 1996년에는 ‘전국여성기능대회’를 열어 많은 여성 기능인 회원들이 결속을 다지고 자긍심을 갖는 기회가 되었다.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 여성운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겨온 한국YWCA 원동력은 바로 ‘회원’에 있다. 전국 회원들이 다짐과 화합의 장을 통해 정의, 평화, 생명의 가치가 구현되는 세상은 노래할 때 YWCA 정신은 널리 퍼져갈 것이다. ‘YWCA, 희망 세상을 만듭니다’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2016 전국회원대회는 YWCA 100년을 향한 꿈과 비전을 함께 나누는 더욱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다. 회원들이 서 있는 바로 그 곳이 YWCA 역사의 현장이다.

2016 YWCA 전국회원대회 준비위원회

대회장 : 이명혜 연합회 회장
준비위원장 : 한영수 연합회 제1부회장
총진행 : 유성희 연합회 사무총장
준비위원
•연합회 위원: 곽지영, 김 미, 김경희, 김기동, 김명희, 김영자, 김은경, 김태연, 문권희, 문미란, 박은경, 백혜진, 안수경, 원영희, 이영희, 이연주, 이종임, 장미란, 전배자, 정유진, 조은영, 최형선, 하은경, 한미미, 함희경 (이상 위원) 강교자, 김 형, 신희운, 이행자, 차경애 (이상 명예연합위원) 구정혜, 명진숙, 박은실 (이하 실무국장) * 가나다순으로 표기했습니다. •지역대표
•책임실무 : 최수산나, 박효정

2016 YWCA 전국회원대회 분과위원회